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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뤼거 (Kruger) # 5

by 형진 posted Jun 1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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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일주일 후.
  둘은 마을로 향했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숲길은 질척였다. 숲은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하늘도 아직 먹구름으로 가려져 있었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듯 무거워 보였다. 아침이었지만 어둑한 숲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까지 가지 않아도 되잖아?"

   형골은 짜증이 났다. 신발과 바지 밑단이 진흙과 물기로 흠씬 젖었다. 게다가 형골은 되도록 마을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욘석아, 언제까지 요런 후미진 숲에 숨어 살 것 같으냐. 마법사가 되려면 마법학교가 있는 황도(皇都)에서도 살게 될 텐데 미리미리 이런 큰 행사는 봐두고 익혀두는 게 좋지. 사람 만나는 법도 배우고, 좀 좋아."

  대규가가 앞서 걸으며 조용히 타일렀다. 비에 젖은 땅이 미끄럽고 푹푹 꺼지는 바람에 조심스레 걸었다.

  "큰 행사는 무슨……. 행정관이나 사무관도 아니고 기껏 지방 주사보(主事補) 몇 명 오는 것 가지고."

  "그나마 그 주사보 얼굴 보는 것도 5년만이니까 마을로서는 큰 행사 아니겠냐."

  "쳇, 그런 높고 높으신 정부요인들께서 이런 깡촌에 오시려 하겠어? 억만금을 준다 해도 안 오지."

  형골이 가볍게 내뱉었다.
  형골은 대규가가 말한 '마법학교'에 마음이 쓰였다. 형골은 마법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더 나아가 스승인 대규가를 좇아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대규가에게 마법을 배우다 보면 언젠가 마법사가 되는 줄 알고 있었다. 마법학교 졸업이 필요한지는 몰랐다. 형골은 갈 길이 아직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왠지 가슴이 설렜다. 기분이 좋았다.
  아직 마법 시전에 관한 훈련은 하지 않았지만 형골이 마법 이론을 배운 지는 꽤 되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대규가의 표현대로 '마법의 본질'에 대한 것뿐이었다. 응용·각종 마법의 이론 등은 배우지 않은 채였다. 형골은 마법사 중에서도 흑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스승이 흑마법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흑마법 자체의 속성이 형골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흑마법은 악마의 힘을 빌리는 이상야릇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흑마법보다 오히려 정령술의 정의에 가까운 설명이다. 마법은 정령술과 달리 오로지 마법사 본인의 마법력을 이용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마법은 단지 그 속성에 의해 흑마법과 백마법으로 나뉜다. 대규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본질'로 인해 둘로 갈리는 것이다. 둘의 본질은 매우 다르다.

  흑마법의 본질이 갖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① 많은 마법력 필요.
  ② 높은 집중력 필요.
  흑마법은 '파괴'의 속성을 갖는다. 마법은 본디 마음으로 그리거나 생각한 것을 형상화·실체화하기 위한 기술이다. 즉, '대상물의 파괴'를 마음으로 그리거나 생각하여 형상화·실체화하는 것이 흑마법이다. 그러나 대상물의 파괴를 그리거나 생각한 것만으로 그 대상물이 파괴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바위를 노려보며 '파괴되어라!' 라고 마음먹는 것만으로는 바위는 파괴되지 않는다. 즉,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마법은 환상이나 동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흑마법은 이 문제를 '파괴의 수단' 자체를 직접 마법력으로 만들어 해결한다. 예컨대, 바위의 파괴를 마음으로 그리면서 마법력을 '물리적 타격'으로 변환한다. 이때 변환되는 마법력이 클수록 그 '물리적 타격', 즉 파괴의 수단이 갖는 강도(세기)도 커진다.

  이처럼 백마법과 달리 마법사의 마법력'만'으로 그 '파괴의 수단'을 형상화·실체화하기 때문에 마법력의 소모가 극히 심하다. 따라서 대개 마법력 증대(增大)와 정제(精製)에 대한 훈련을 한다. 마법력이란 것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마법력 '증대 훈련'으로 키울 수 있는 마법력은 일정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잠재 마법력이 작은 경우에는 '정제 훈련'으로 마법력의 순도를 높인다. 물론 정제 훈련은 마법력의 순도만 높일 뿐 크기를 키우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 시전하지 못했던 고급 마법을 시전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즉, 한 번 시전할 때 평소에는 마법력 10이 들었다면, 훈련 후에는 마법력 5 정도로 한 번 시전할 수 있게 될 뿐이다. 이렇게 마법 시전 횟수는 늘어나지만 상위의 고급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하진 못한다.(고급 마법 시전에는 더 큰 마법력이 필요할 뿐이다. 물론 훗날 형골이 이 불변의 원리를 깨기 전까지는 그랬다.) 즉, 증대와 정제에 대한 훈련으로도 마법력의 선천적 한계를 넘기는 힘들다. 이 점이 흑마법의 특징이자 어려움이다. 마법력의 소모는 극심한 데에 반해 마법력 자체를 키우기는 어렵다. 마법력이 선천적으로 작은 마법사는 흑마법사로서 한계와 절망에 금방 도달하게 된다.

  또한 흑마법은 백마법에 비해 더 높은 집중력이 요구된다. 집중력은 마법의 시전 횟수, 지속 시간, 세기 등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흑마법은 마법력의 소모가 매우 큰데 마법력의 소모는 다시 체력을 고갈시킨다. 즉, 흑마법은 체력이 고갈되는 상태에서도 마법 시전을 연발할 수 있도록 고도의 집중력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집중력 강화 훈련도 필요하지만 체력 훈련도 함께 해야한다. 또한 '파괴의 수단'으로 변환된 마법력이 대상물(또는 대상 공간)에 오래 머물도록 할 때에도 집중력이 요구된다. 오래 머물수록 시전된 마법의 지속 시간이 길어진다. 그리고 마법의 세기와도 연관된다. 시전된 마법의 세기는 변환되는 마법력의 크기로 결정된다. 다만 이때 원하는 만큼 마법력을 변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즉 순간적으로 변환하는 마법력이 클수록 높은 집중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외에 마법 시전에도 집중력은 물론 필요하다. 마법력 변환 자체가 집중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백마법은 '활성'의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속성은 '대상물의 활성'을 뜻하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에너지의 활성'을 일컫는다. 즉 백마법의 특성은 '에너지 감지력 필요' 한 가지로 요약된다. 백마법은 마법력 자체를 변환하여 형상화·실체화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마법력으로 주변의 에너지를 활성화 또는 집결시키는 것뿐이다. 흑마법과는 대단히 다른 개념이다. 예컨대, 흑마법은 마법력을 변환하여 직접 '불'을 형상화·실체화한다. 그러나 백마법은 주변의 '열 에너지'를 특정 대상물(또는 특정 공간)에 활성화시키나 집결시켜 '불'을 형상화·실체화한다. 만약 주변에 '열 에너지'가 없다면 '불'을 형상화·실체화할 수 없다. 따라서 백마법은 주변의 상황에 따라 변수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 점이 백마법이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유이다. 이 변수를 줄이기 위하여 백마법사는 필히 '에너지 감지 훈련'을 하여 그 능력을 키운다. 주변에 원하는 에너지가 있는지 없는지, 있으면 얼마나 있는지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깨닫기 위함이다.

  마법력은 에너지의 활성과 집결에만 쓰이기 때문에 흑마법에 비하여 그 소모가 크지 않다. 집중력도 흑마법에 비해 크게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활성화시키고 집결시킬 에너지의 양이 크거나, 에너지가 먼 곳에 존재할 수록 마법력 소모는 커지고 요구되는 집중력도 높아진다. 또한 활성화시키고 집결시킨 '다수'의 에너지들을 어떻게 '합성'하고 '분리'하느냐에 따라 백마법에서 고급 마법의 등급이 갈린다.

  흑백을 불문하고 마법사는 물질에 대한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흑마법의 경우는 '대상물의 파괴'와 '파괴의 수단'을 위한 지식을 얻어야 한다. 예컨대, A라는 대상물이 물의 속성에 가까운지 돌의 속성에 가까운지에 따라 마법력을 무엇으로 변환할 것인가가 달라진다. 흑마법사에게 이런 지식이 부족하다면 물을 물로 파괴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도 있다. 특히 백마법사는 지식이 더욱 많이 필요하다. 흑마법의 경우처럼 물질의 속성과 그에 대한 대응 수단을 알기 위해서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백마법의 본질상 각 에너지의 성질 및 그 합성과 분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고급 마법을 시전할 수 있다. 또한 각 물질 안에 존재하는 에너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에너지는 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에게도 존재한다.

  둘은 어느덧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대규가는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약속 시간에 늦은 탓에 진흙길을 급히 걸어왔기 때문이다. 늙은 몸에 무리가 갔다. 그러나 쉴 틈도 없이 대규가는 서둘러 마을 장로의 집으로 향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마을은 이미 축제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마을 중앙로를 따라 길 양편으로 작은 꽃들이 심어 있었다. 보기 힘든 야생초였으나 색깔이 지나치게 화려했고 다양했다. 그 점이 오히려 촌스럽게 보여 형골은 피식 웃었다. 사람들은 밤에 있을 축제를 위해 벌써부터 말끔한 옷을 입고 다녔다.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마법사에게 인사를 하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형골을 보고는 굳은 얼굴로 멈춰 섰다.
  장로의 집 앞에는 저녁에 있을 축제를 위해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둘은 장로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마법사님이 이제 오시네요!"

  '반점대머리' 수길이 넉살좋게 웃으며 반겼다. 조그마한 집은 들어가자마자 식탁이 보였다. 대규가의 집과 구조가 많이 다르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4명이었다. 수길이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대규가에게 다가왔다. 팔을 잡아끌며 관복(官服)을 입고 있는 사람 앞으로 인도했다. 무심코 형골도 수길을 쫓아갔으나 아무도 모르게 수길이 뒷발로 정강이를 찼다. 형골은 인상을 찌푸린 채 문설주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아, 한 분밖에 안 오신 것입니까?"

  대규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수길에게 물었다.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수길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운한 기색을 애써 숨기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분께서 이번에 우리 마을 축제를 축복해 주시러 오신 박랑모 주사보(主事補)님이십니다. 먼 길인데도 힘든 발걸음을 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사 '퀴트린'입니다."

  대규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박랑모는 거만한 표정으로 목만 까닥였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계속 했다. 수길은 당황하지 않고 대규가를 다음 손님에게 인도했다. 박랑모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잔뜩 긴장하고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대규가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 분은……."

  "아, 정말 반갑습니다! 이렇게 뵙다니 정말 꿈만 같군요!!"

  그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대규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수길은 적잖이 당황했다. 박랑모도 음식을 씹다말고 그자를 황당하다는 듯 치어다봤다.

  "진작에 찾아와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행정 일에 치여 쉽게 시간을 낼 수 없어서요. '퀴트린' 마법사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사실 이곳에 오는 것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아무리 깡촌에 있는 실보사(實補士 : 수습마법사로 품서는 5품. 주로 지방에 발령된 수습마법사의 직책.)라도 궁정마법부로부터 직접 승인을 받아야 하는지라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렇게 뵙게 되니 그 동안 조바심 낸 게 보람이 있었네요! 교과서에 나오는 분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말이죠!"

  그자는 큰소리로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다. 대규가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마법사이신가 봅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긴장을 해서, 제 소개를… 예, 저는 마법사 '벼리' 라고 합니다. 백색 치유마법(백마법 계열의 치유마법이라는 뜻.)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

  대규가는 익숙한 이름을 듣고 다시 빙그레 웃었다.

  "역시 기억하시는군요. 앗, 죄송합니다. 당연히 기억하시겠지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래도 동문수학한 '기문' 마법사님의 본명이니까요. 제 마법력이 조금만 더 컸어도 '기문' 마법사님처럼 흑색 냉결(冷結)마법(흑마법 계열의 냉결마법이라는 뜻. 마법력으로 차가운 기운을 만들어 시전하는 마법.)을 전공했을 겁니다. 역사에 기록된 얼음 타격전은 정말 모든 남학생들의 로망이었죠! 원비국에 침입한 북방민족 한 군단(軍團)을 그대로 말살시킨 그 대목은 정말 아직도 제 가슴을 뛰게 합니다! 대예언자 '바로크'의 제자들인 '검은 6좌' 중에서 유일하게 그 활약이 역사에 기록된 분이기도 하구요."

  마법사 '벼리'는 '말살'이란 부분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눈을 반짝이며 불끈 쥔 주먹을 흔들었다. 아이와 같은 모습에 절로 미소가 방안에 퍼졌다. 그러나 형골은 '바로크'라는 이름을 듣고 신경이 곤두섰다. 대규가의 표정을 살폈다. 대규가는 마냥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바로크'가 '검은 6좌' 중 가장 아꼈다던 '퀴트린' 마법사님을 뵙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대규가, 즉 마법사 '퀴트린'은 예언자 '바로크'의 여섯 제자들 중 막내였다. '바로크'가 정령술사가 되기 몇 해 전에 어린 대규가를 제자로 들였다. 막내인 그는 사랑을 독차지했다. 다른 다섯 마법사들도 그를 어여삐 여긴 건 마찬가지였다. 다른 제자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그들은 대규가를 자신의 제자인 것처럼 아꼈다.

  "저,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마법사 '벼리'가 갑자기 소리를 죽이고 얼굴을 바짝 들이댄 채 물었다.

  "'검은 6좌'는 각자 특출한 기술을 전공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이것과는 별도로 '바로크'가 제자들에게 이미 실전(失傳)되거나 금기된 마법도 가르친 걸로 알려졌는데…… '기문' 마법사님의 것은 무엇이나요?"

  "저희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셔서 정말 놀라고 감사합니다만 그 부분을 발설하면 돌아가신 '기문' 마법사님께 혼날 것 같군요. 또 워낙 금기되는 마법인지라 말씀드리기도 저어하고요."

  "금기라… 역시 그랬군요."

  "대신 제 전공 마법을 알려드려도 될까요. 큰 기쁨은 되지 않겠지만 아직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저는 흑색 봉인 마법(흑마법 계열의 봉인 마법을 뜻함.)을 전공으로 하지요."

  "오!"

  마법사 '벼리'는 다른 답을 들었는데도 실망한 낯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충만한 눈빛으로 대규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봉인 마법이 아닌 흑마법 계열의 봉인 마법을 전공으로 한 마법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사실 대규가는 '검은 6좌' 중에서도 일반 봉인 마법과 흑색 봉인 마법으로는 단연 최고였다.

  "'벼리' 마법사, 이쯤해서 그만합시다. 웬 호들갑을 그리 떠시오? 우린 공무수행 중인 것을 잊지 마시오."

  음식을 다 먹은 박랑모가 퉁명스레 말했다. 마법사 '벼리'는 듣는지 마는지 계속 흥분한 표정으로 '흑색 봉인 마법이라… 흑색이라…' 를 중얼거렸다.

  수길은 오히려 마법사 '벼리'의 호들갑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번에 마을을 방문하도록 초청했던 지방 정부 공무원들 중 한 명밖에 오지 않은 터라 수길은 적잖이 실망해 있었다. 그 동안 갖다바친 돈과 약초들이 아까웠다. 수길은 대륙에서 몇 안 되는 약초 생산지인 자신의 고향이 여러 면에서 뒤떨어지는 걸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분했다. 그래서 줄곧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에 연줄이 닿는 데에까지 로비를 하여 정부의 지원과 투자를 얻어내려 하였다. 작게나마 준비한 이번 축제도 그런 연유로 마련하였다. 먼저 지방 정부의 눈부터 사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직접 마을 이름으로 지방 정부의 공무원들을 초청하여 약초 재배지를 보여주고 마을 주민들의 열의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한 명밖에 오지 않았다. 그나마 온 사람도 하급 직책인 주사보였다. 주사보는 정책 결정에 힘을 쓸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황도(皇都)에서도 멀리 떨어진 국경선 부근 시골 마을의 한계일까, 수길은 마음이 상했다. 마을을 방문한 주사보도 연실 인상을 찌푸리며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가기 싫은 하급 공무원을 상부에서 억지로 가라고 시킨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함께 따라온 마법사는 얼치기였다.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약 중독자처럼 줄곧 흥분 상태였다. 도저히 이번 축제에 무게가 실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에서 유일한 마법사인 대규가 선생이 들어서자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도 대규가 선생이 그렇게 유명한 마법사인지 몰랐다. 박랑모 주사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함께 따라온 마법사 '벼리'같은 삼류 마법사로만 생각하여 우습게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적시에 터진 마법사 '벼리'의 호들갑이 호재였다. 비록 마법사 둘이 나누는 얘기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수길은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박랑모 주사보도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 조금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대규가를 바라봤다. 박랑모 주사보가 정책 결정에 힘을 쓸 수 없는 위치라면, 그 대신에 마을에 관한 좋은 얘기를 정부 내에 퍼트려 주면 되는 것이다. 수길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작은 대규가 선생의 존재였고, 마무리까지는 자신의 장사치 수완으로 충분히 해 볼만했다.

  "자, 마법사님도 오셨고, 주사보님도 식사를 다 하신 듯 하니 이제 나갈까요. 축제는 저녁에 있을 예정입니다. 그 전까지 저희 약초 재배지와 서식지, 저장고 등도 돌아보시죠. 약초 향만 맡아도 아마 잔병들이 사라질 겁니다. 아, 장로님께서는 여기에서 축제 준비를 도우실 겁니다. 제가 모시도록 하죠."

  수길이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박랑모 주사보가 일어나 집문 밖을 향했다. 그 뒤를 수길이 따랐고, 마법사 '벼리'는 그 뒤에서 대규가와 함께 걸어 나갔다.
  형골은 난감했다. 대규가를 따라가자니 수길의 눈치가 보였고, 마을에 머물자니 주민들 눈치가 보였다. 여짓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대규가가 다가와 속삭였다.

  "축제 준비를 도와."

  "쳇!"

  어쩔 수 없다고 형골은 생각했다. 스승의 뒤를 따라 장로의 집을 나섰다. 수길 일행은 마을 중앙로를 걸어 숲으로 향했다. 여전히 하늘은 먹구름에 싸여 있었다. 형태는 보이지 않았지만 태양이 중천에 걸린 듯 했다. 유달리 하늘의 한가운데만 밝았다. 오후를 넘어가면서 기온이 올라갔다. 높은 습도와 기온으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을 싫어하고, 자신도 싫어하는 마을 한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형골은 가볍게 침을 뱉었다.

  "여어∼ 이게 누구야. 대∼마법사 형골 아니신가?"

  퍼뜩 놀라 옆을 보니 젊은 청년 패거리가 보였다. 옷 꼬락서니는 스스로 양아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앞서 걷던 갈색머리가 다시 말했다.

  "역시 축제는 화합의 장! 도망간 우리 동무도 돌아오게 만드네. 반갑고 반갑고 시벌나게 반가워라. 캬아, 시(詩)가 따로 없구만!"

  민수였다. 근육에 싸인 팔을 흔들며 형골을 불렀다. 형골은 헛웃음을 띄며 민수와 거칠게 악수를 했다.

  "오랜만이다."

  "몇 년만이야! 왜 이렇게 꽁무니를 숨기고 다녀? 영감한테 마법 배우느라 우리 우정과 추억은 잊어버린겨? 영감 엉덩이가 언니들 가슴보다 그렇게도 질감이 더 좋던가?"

  민수가 이죽거렸다. 패거리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주변에 있던 주민들이 슬금슬금 그들을 피해 걸어갔다. 형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너 만나려고 했다. 오늘이 대목이잖냐. 돈이 모인다 이거지. 마법사 영감도 오늘 마을로 올 게 분명하니 너 혼자 집에 있거나 너도 마을에 올 거라 생각했어. 여기저기 돈 냄새가 펑펑 풍기는데 가만히 있으면 우린 사내가 아니다!"

  민수가 형골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예전에 형골과 민수는 곧잘 마을에서 돈을 훔쳐 옆마을인 류화 등에서 유흥비로 썼다. 패거리가 함께 훔치면 입이 많아 나중에 말이 돌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꼭 둘이서 자금을 마련하곤 했다. 무엇보다 이 둘의 기술은 신묘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쌓아온 내공이리라.

  "병신…… 돈 냄새가 아니라 음식 냄새겠지.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난 이제 그런 짓 안 해."

  "엉? 그런 짓이 뭔데, 이쁘은∼ 짓? 야, 형골, 너 혼자 멋난 척 하지마. 내가 지금 차렷 자세로 말하니까 우습지? 우리가 너 하나 손 못 봐줄 것 같냐? 그래, 솔직히 영감이랑 있을 때는 영감 마법이 무서워서 못 찾아갔다. 어릴 때 너랑 붙다가 영감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지만, 여긴 지금 영감 없어. 니 똥오줌 받아줄 사람이 없다 이거야."

  "……."

  형골은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폭발할 것 같은 뜨거움이 가슴에 차올랐다. 형골은 부러 시선을 땅에 꽂았다.

  "야, 깝치지마. 너나 우리나 다를 것 같냐? 마법 좀 배운다고 달라질 것 같아? 지랄하네. 넌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넌 바뀔 놈이 아냐. 내가 안다구! 바꿀 수 있는 놈이 아니라구. 너 스스로도 니 근본을 잘 알잖아!?"

  민수가 형골을 노려보며 거칠게 내뱉었다. 하지만 형골은 그에 아랑곳없이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민수가 손을 뻗어 형골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축제 준비를 하던 장로와 눈이 마주쳤다. 장로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민수를 바라보았다. 민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장로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장로가 빤히 보는 앞에서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건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쁜 친구 형골아! 밤 축제 때 다시 올께. 부디 니 재능을 썩히지 마라. 언니들이 니 살내음 맡고 싶다고 난리야!"

  민수가 능글맞은 웃음을 띄며 외쳤다. 패거리의 비웃음이 들렸다. 형골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늘에서 태양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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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후다닥 다음 전개를 쓰고 싶은데 계속 한 에피소드마다 분량이 늘어나서 죽겠습니다;; 조절을 못하겠네요. 퇴고시 대량 삭제를 강행해야할지...;음.
개인 홈피 홍보 중입니다~ 가입과 방문 부탁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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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