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오(Duo)] - #01. 레이첼, 붉은 새
싫어. 나는 붉은 새에게 말했다. 새는 웃었다. 아무런 적의도 없는 웃음.
알고 있다. 새가 바라는 것은 그저 내가 떠나는 것 뿐. 붉은 새의 발톱이 나를 휘감는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
“-이, 레이, 일어나.”
어렴풋이 들려오는 레오닐의 목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아아, 더 자고 싶어. 뒤숭숭한 꿈 때문인지 피곤함이 가시질 않는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깨어나지 않은 척 했다.
“레이, 레이-. 자?”
“으으음.”
나는 잠결인 척 부스럭부스럭 내 쌍둥이 형제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평소라면 레오를 깨우는 것은 내 몫이다. 걷어차도 일어나지 않는 주제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을 떠는 거지…….
하긴 침대에 누운 채 꼼지락 꼼지락 옆 사람을 깨우려 하는 걸 부지런하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안자는 거 다 알아.”
레오의 팔이 목을 감아오는 게 느껴졌다.
레오의 숨결이 귀를 간질인다. 그리고 등에서 느껴지는 레오의 심장박동.
엄마 뱃속에서부터 들어왔던 익숙한 소리, 익숙한 냄새에 기분이 좋아서 잠시 기다렸다가
짐짓 투덜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율법 위반이야, 레오.”
“역시 안자고 있었지? 벌이다!”
레오가 목에서 팔을 풀더니 겨드랑이를 찔러대기 시작한다.
으악! 나는 몸부림치다 뒤로 홱 돌아 팔을 못 움직이도록 레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간지럼 태우지 말랬지! 싫단 말이야.”
“율법 위반이야, 레이.”
“싸울래?”
“……미안합니다. 이제 안 할 테니까 놔줘.”
나는 레오를 붙잡고 있던 팔을 풀었다. 레오는 데굴데굴 굴러 바로 눕더니
이마를 덮고 있던 퍼석퍼석한 금발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아아, 지푸라기 같아. 나랑 머리 바꾸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일찍부터 야단이야?”
“어라-, 잊었어? 시레 집 창고에 들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고. 오늘 보러 가기로 했잖아.”
아아, 그것 때문이구나. 시레가 일어날 때 까지는 가볼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일찌감치 설치는 걸 보니,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속으로는 대단히 흥분해 있는 모양이다.
레오는 가끔 정말 어린아이처럼 굴 때가 있다.
“이 시간엔 아직 시레는 한창 꿈속을 헤매고 있을 텐데.”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나 좀 더 잘래. 이상한 꿈을 꿔서 피곤하단 말이야.”
“무슨 꿈?”
“몰라, 기억 안 나. 잘 테니까 나중에 깨워.”
나는 말하기 귀찮아서 거짓말하며 돌아누웠다.
뒤에서 레오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뒤척뒤척, 부스럭 부스럭.
나름대로 잠을 자 보려고 노력하는 모양이다. 침대가 흔들리는 건 그렇다 치고
낡은 침대 다리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통에 나까지도 잠을 잘 수 가 없다.
이럴 때는 정말로 내 침대가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하지만
집에는 남는 방이 없고 같은 공간에 두 개의 잠자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따라
방에 침대를 두 개 두는 것도 불가능하니 참는 수밖에.
눈을 감은 채 소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뒤에서 레오가
내 허리를 껴안으며 소근 거린다.
“-나 잠이 안 오는데, 레이.”
어쩌라고……. 정말이지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눈을 뜨고부터 침대를 벗어나기까지 수 십 가지의 율법을 위반한 후 우리는
아침식사를 하러 부엌으로 갔다.
“안녕, 엄마! 좋은 아침.”
“잘 잤니? 우리 아들들.”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자꾸만 하품이 나온다.
연신 눈물을 닦으며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오늘 아침도 건더기를 찾기 힘든 멀건 국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쭉 이 모양이지만
엄마 혼자 힘들게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오는 숟가락을 그릇에 넣고 휘젓다말고 아예 그릇을 들고 후루룩 마시더니
소매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엄마, 우리 시레 집에 다녀올게.”
난 아직 덜 먹었는데.
“이렇게 일찍? 너무 이른 시간에 이웃을 방문하는 건 실례란다, 레오닐.”
“에-, 주위에서 조금 놀다가 가지 뭐.”
“그럼 갈 때 감자 좀 가져가서 우유랑 바꿔오겠니? 우유가 다 떨어졌거든.”
“알았어.”
레오는 벌떡 일어났다. 난 아직 덜 먹었다니까. 내 팔을 붙잡으려는 레오를 피하며
쏘아보고 있는데 엄마가 손뼉을 딱 쳤다.
“아 참, 그렇지. 오늘 일꾼 아저씨가 오기로 했으니까 너무 늦게 오지는 말아라.”
“일꾼?”
“지난번에 말 했잖아. 허드렛일 해 줄 사람을 고용했으니까 헛간 좀 치워달라고.”
“아 그랬지.”
엄마 혼자 농사를 짓고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엔 아무래도 벅차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가 돕는다고 해도 애들 힘엔 한계가 있으니까.
마침 먹을 것과 잠자리만 제공해 주면 된다는 사람이 나타났기에 마당에 있는
헛간을 정비해 제법 사람이 살 수 있을 법한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사람이 오는 게 바로 오늘인 모양이다.
다 먹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럼 이제 나가자, 레오.”
“응. 다녀오겠습니다!”
우리는 감자가 든 주머니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우리 집은 섬의 1층 가장자리, 폭포 줄기 근처에 위치해 있어 아침에는 공기가 조금 습하다.
섬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수증기가 되어 다시 위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다지 짙지도 않고 해가 조금만 뜨거워져도 곧 사라질 테지만 아침안개가 낀 숲길을
걷는다는 것은 나름대로 기분 좋은 일이다.
“아아,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좋은 날씨구만!”
레오는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율법 위반이야, 레오. 위를 보면 안 돼.”
“괜찮아, 괜찮아. 아무도 없잖아. 들키지만 않으면 돼.”
그야 그렇지만. 혹시 누가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해서 주위를 둘러보다
다시 레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레오는 나무에 기대 서 있었다. 들고 있던 감자주머니는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아 둔 채였다.
“뭘 하려고?”
“시레 집에 가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며. 이것 좀 봐 줘.”
레오는 감자주머니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있던 매듭이
스르륵 풀리며 감자 두 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두 개의 감자는 레오가 움직이는
손가락을 따라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헤에, 많이 늘었네?”
“아직 매듭을 묶는 것 까진 못하지만.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두 개가 한계야.”
말을 걸자마자 레오의 집중이 흐트러진 듯 감자들의 움직임이 불안정해졌다.
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던 두 개의 감자가 다시 안정적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깃털 하나 들어 올리는 것도 힘들어했던 때에 비하면 굉장한데. 언제 연습했어?”
“매일 밤, 너 잘 때 몰래.”
아하, 아침에 발로 몇 번을 걷어차도 일어나지 못했던 게 다 그 때문이었구만.
“치사하게 혼자 연습하냐. 나도 깨우지.”
“……보여주기 부끄러워서.”
부끄럽긴 대체 뭐가 부끄럽다는 거야.
고작 5분차이지만 형으로서 동생인 나보다 못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건가, 설마. 평소에도 부끄러운 짓만 잘도 해대면서 새삼 이런 부분에
얼굴을 붉힌다는 점이 레오답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내게 숨기는 게 있었다는
데는 좀 열 받는다. 나는 손가락을 펴 레오의 옆구리에 분노의 일침을 날렸다.
“으악!”
감자가 추락하다 지면 바로 위에서 가까스로 낙하를 멈추며 슬금슬금 다시 떠올랐다.
우유랑 바꿔가야 할 감자라 레오도 제법 필사적이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레이!”
“날 속인 벌이야.”
“속인 적 없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까불지 마. 또 숨기고 있는 건 없겠지? 나중에 숨기고 있던 거 하나라도
발견되면 섬 밖으로 날려버릴 테니까.”
“……미안. 안 그럴게. 더 숨기는 거 없어.”
“정말이지?”
“응.”
레오가 잔뜩 수그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라고 한마디 더 해주려다가 문득 아침에 나도 꿈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거짓말 한 게 생각났다. 이걸 알면 레오도 분명 화내겠지.
더 이상 찌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좋은 아침이지, 꼬마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훤칠한 청년이 바로 뒤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투둑, 감자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빙그레 웃고 있는 그의 얼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청년의 붉은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꿈에서 보았던 타는 듯 한 깃털의 붉은 새.
……무서워.
나는 팔을 뻗어 레오의 손을 붙잡았다.
어쩐지, 지금 놓으면 다시는 잡지 못할 것 같아.
------------------------------------------------------------------------------
어쩐지 쓰다보니 형제덮밥(<전문용어).....
이란 느낌이 들지만 그런거 아닙니다 ㅇㅇ.
다음 편은 레오닐 시점.
싫어. 나는 붉은 새에게 말했다. 새는 웃었다. 아무런 적의도 없는 웃음.
알고 있다. 새가 바라는 것은 그저 내가 떠나는 것 뿐. 붉은 새의 발톱이 나를 휘감는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
“-이, 레이, 일어나.”
어렴풋이 들려오는 레오닐의 목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아아, 더 자고 싶어. 뒤숭숭한 꿈 때문인지 피곤함이 가시질 않는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깨어나지 않은 척 했다.
“레이, 레이-. 자?”
“으으음.”
나는 잠결인 척 부스럭부스럭 내 쌍둥이 형제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평소라면 레오를 깨우는 것은 내 몫이다. 걷어차도 일어나지 않는 주제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을 떠는 거지…….
하긴 침대에 누운 채 꼼지락 꼼지락 옆 사람을 깨우려 하는 걸 부지런하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안자는 거 다 알아.”
레오의 팔이 목을 감아오는 게 느껴졌다.
레오의 숨결이 귀를 간질인다. 그리고 등에서 느껴지는 레오의 심장박동.
엄마 뱃속에서부터 들어왔던 익숙한 소리, 익숙한 냄새에 기분이 좋아서 잠시 기다렸다가
짐짓 투덜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율법 위반이야, 레오.”
“역시 안자고 있었지? 벌이다!”
레오가 목에서 팔을 풀더니 겨드랑이를 찔러대기 시작한다.
으악! 나는 몸부림치다 뒤로 홱 돌아 팔을 못 움직이도록 레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간지럼 태우지 말랬지! 싫단 말이야.”
“율법 위반이야, 레이.”
“싸울래?”
“……미안합니다. 이제 안 할 테니까 놔줘.”
나는 레오를 붙잡고 있던 팔을 풀었다. 레오는 데굴데굴 굴러 바로 눕더니
이마를 덮고 있던 퍼석퍼석한 금발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아아, 지푸라기 같아. 나랑 머리 바꾸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일찍부터 야단이야?”
“어라-, 잊었어? 시레 집 창고에 들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고. 오늘 보러 가기로 했잖아.”
아아, 그것 때문이구나. 시레가 일어날 때 까지는 가볼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일찌감치 설치는 걸 보니,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속으로는 대단히 흥분해 있는 모양이다.
레오는 가끔 정말 어린아이처럼 굴 때가 있다.
“이 시간엔 아직 시레는 한창 꿈속을 헤매고 있을 텐데.”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나 좀 더 잘래. 이상한 꿈을 꿔서 피곤하단 말이야.”
“무슨 꿈?”
“몰라, 기억 안 나. 잘 테니까 나중에 깨워.”
나는 말하기 귀찮아서 거짓말하며 돌아누웠다.
뒤에서 레오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뒤척뒤척, 부스럭 부스럭.
나름대로 잠을 자 보려고 노력하는 모양이다. 침대가 흔들리는 건 그렇다 치고
낡은 침대 다리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통에 나까지도 잠을 잘 수 가 없다.
이럴 때는 정말로 내 침대가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하지만
집에는 남는 방이 없고 같은 공간에 두 개의 잠자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따라
방에 침대를 두 개 두는 것도 불가능하니 참는 수밖에.
눈을 감은 채 소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뒤에서 레오가
내 허리를 껴안으며 소근 거린다.
“-나 잠이 안 오는데, 레이.”
어쩌라고……. 정말이지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눈을 뜨고부터 침대를 벗어나기까지 수 십 가지의 율법을 위반한 후 우리는
아침식사를 하러 부엌으로 갔다.
“안녕, 엄마! 좋은 아침.”
“잘 잤니? 우리 아들들.”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자꾸만 하품이 나온다.
연신 눈물을 닦으며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오늘 아침도 건더기를 찾기 힘든 멀건 국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쭉 이 모양이지만
엄마 혼자 힘들게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오는 숟가락을 그릇에 넣고 휘젓다말고 아예 그릇을 들고 후루룩 마시더니
소매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엄마, 우리 시레 집에 다녀올게.”
난 아직 덜 먹었는데.
“이렇게 일찍? 너무 이른 시간에 이웃을 방문하는 건 실례란다, 레오닐.”
“에-, 주위에서 조금 놀다가 가지 뭐.”
“그럼 갈 때 감자 좀 가져가서 우유랑 바꿔오겠니? 우유가 다 떨어졌거든.”
“알았어.”
레오는 벌떡 일어났다. 난 아직 덜 먹었다니까. 내 팔을 붙잡으려는 레오를 피하며
쏘아보고 있는데 엄마가 손뼉을 딱 쳤다.
“아 참, 그렇지. 오늘 일꾼 아저씨가 오기로 했으니까 너무 늦게 오지는 말아라.”
“일꾼?”
“지난번에 말 했잖아. 허드렛일 해 줄 사람을 고용했으니까 헛간 좀 치워달라고.”
“아 그랬지.”
엄마 혼자 농사를 짓고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엔 아무래도 벅차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가 돕는다고 해도 애들 힘엔 한계가 있으니까.
마침 먹을 것과 잠자리만 제공해 주면 된다는 사람이 나타났기에 마당에 있는
헛간을 정비해 제법 사람이 살 수 있을 법한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사람이 오는 게 바로 오늘인 모양이다.
다 먹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럼 이제 나가자, 레오.”
“응. 다녀오겠습니다!”
우리는 감자가 든 주머니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우리 집은 섬의 1층 가장자리, 폭포 줄기 근처에 위치해 있어 아침에는 공기가 조금 습하다.
섬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수증기가 되어 다시 위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다지 짙지도 않고 해가 조금만 뜨거워져도 곧 사라질 테지만 아침안개가 낀 숲길을
걷는다는 것은 나름대로 기분 좋은 일이다.
“아아,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좋은 날씨구만!”
레오는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율법 위반이야, 레오. 위를 보면 안 돼.”
“괜찮아, 괜찮아. 아무도 없잖아. 들키지만 않으면 돼.”
그야 그렇지만. 혹시 누가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해서 주위를 둘러보다
다시 레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레오는 나무에 기대 서 있었다. 들고 있던 감자주머니는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아 둔 채였다.
“뭘 하려고?”
“시레 집에 가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며. 이것 좀 봐 줘.”
레오는 감자주머니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있던 매듭이
스르륵 풀리며 감자 두 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두 개의 감자는 레오가 움직이는
손가락을 따라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헤에, 많이 늘었네?”
“아직 매듭을 묶는 것 까진 못하지만.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두 개가 한계야.”
말을 걸자마자 레오의 집중이 흐트러진 듯 감자들의 움직임이 불안정해졌다.
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던 두 개의 감자가 다시 안정적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깃털 하나 들어 올리는 것도 힘들어했던 때에 비하면 굉장한데. 언제 연습했어?”
“매일 밤, 너 잘 때 몰래.”
아하, 아침에 발로 몇 번을 걷어차도 일어나지 못했던 게 다 그 때문이었구만.
“치사하게 혼자 연습하냐. 나도 깨우지.”
“……보여주기 부끄러워서.”
부끄럽긴 대체 뭐가 부끄럽다는 거야.
고작 5분차이지만 형으로서 동생인 나보다 못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건가, 설마. 평소에도 부끄러운 짓만 잘도 해대면서 새삼 이런 부분에
얼굴을 붉힌다는 점이 레오답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내게 숨기는 게 있었다는
데는 좀 열 받는다. 나는 손가락을 펴 레오의 옆구리에 분노의 일침을 날렸다.
“으악!”
감자가 추락하다 지면 바로 위에서 가까스로 낙하를 멈추며 슬금슬금 다시 떠올랐다.
우유랑 바꿔가야 할 감자라 레오도 제법 필사적이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레이!”
“날 속인 벌이야.”
“속인 적 없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까불지 마. 또 숨기고 있는 건 없겠지? 나중에 숨기고 있던 거 하나라도
발견되면 섬 밖으로 날려버릴 테니까.”
“……미안. 안 그럴게. 더 숨기는 거 없어.”
“정말이지?”
“응.”
레오가 잔뜩 수그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라고 한마디 더 해주려다가 문득 아침에 나도 꿈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거짓말 한 게 생각났다. 이걸 알면 레오도 분명 화내겠지.
더 이상 찌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좋은 아침이지, 꼬마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훤칠한 청년이 바로 뒤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투둑, 감자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빙그레 웃고 있는 그의 얼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청년의 붉은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꿈에서 보았던 타는 듯 한 깃털의 붉은 새.
……무서워.
나는 팔을 뻗어 레오의 손을 붙잡았다.
어쩐지, 지금 놓으면 다시는 잡지 못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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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쓰다보니 형제덮밥(<전문용어).....
이란 느낌이 들지만 그런거 아닙니다 ㅇㅇ.
다음 편은 레오닐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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