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너무나도 작은 이야기지, 한 사람의 삶이라는 건
그렇지만 네 생각만큼 작지도 않아
세상을 표현하고도 남을 만큼의 크기지, 한 사람의 삶이라는 건
#1
펑! 펑!
찬란한 불꽃이 카한의 수도 뤄에스 하늘에 수놓아 졌다. 붉고 노란 꽃이 어두운 밤하늘에 개화했다가, 순식간에 빛을 다하고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시든다. 그러나 그 잠깐의 불꽃은 성 시민들의 마음과 성 전체를 밝히는 데엔 충분했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5년 만의 축제를 위해 저마다 각가지 색으로 치장을 했다. 분홍, 자주, 노랑 파랑 등등, 염료가 허락하는 차원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수 십 가지의 색은 길거리마다 걸어놓은 수많은 호롱불들로 인해 수 백 가지의 다른 색으로 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뤄에스의 골목들은 사람 소리로 시끄러웠다. 전쟁이 있었던 지난 5년 동안의 침묵을 모두 털어 버리려는 듯, 사람들은 그 동안 옷장 구석에 쳐 박아 두었던
화려한 옷들을 빼어 입고 거리에 활기를 더했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스쳐갔다. 은색 달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변한 한 쌍의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이 사람들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방해했지만, 사람들은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이 여유롭게 축제를 즐겼다.
“묘익수인가?”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묘익수가 지나간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건물의 2층에 앉아 있었다. 마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그의 주변엔 침묵만이 떠돌고 있었다. 그는 저 하늘 멀리 날아가는 거대한 소환수를 보았다. 머리에서 꼬리까지는 10여 미터는 되고 독수리의 그곳을 닮은 하얀 날개는 몸과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다. 고양이의 얼굴에 산양의 뿔이 달린 묘익수는 얼마 전 종전된 5년 전쟁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인 소환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난롯가에서 낮잠을 자는 고양이처럼 얌전히 축제의 밤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불꽃이 터질 때마다 휘황찬란하게 변하는 묘익수들을 보던 남자의 등 뒤로 인기척이 났다. 남자는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날세.”
문이 불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조심스럽게 열린 문 뒤로는 작은 체구의 남자가 서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엔 가시가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전투용 장갑을 끼고 있었고 얇은 겉옷 아래엔 갑옷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는 행여나 누가 볼세라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말했다.
“이거 경비가 심각하게 삼엄하구만. 묘익수만 해도 열 마리가 넘겠군.”
“열 세 마리 입니다.”
상대방이 희미하게 웃는 것이 들렸다.
“그렇지. 솔직히 수 천 마리의 괴수들과 싸우던 우리가 소환수 열 세 마리에 겁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안 그런가, 전?”
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일단 불부터 좀 피우시죠. 호롱은 탁자 위에 있습니다.”
그의 말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놀려 호롱불을 당겼다. 호롱 내부에 부싯돌과 발화장치가 있어 굳이 따로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었다. 약한 기름 냄새와 함께 약한 빛이 피어 올랐다. 그러자 그 동안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던 전의 모습이 똑똑하게 보였다.
남자가 물었다.
“자네 아버지가 () 대륙 출신이라고 했나?”
“그렇죠. 뭐, 지금은 저 아래서 어머니와 상업을 하시겠지만.”
남자는 호롱불을 책상 가운데로 밀었다. 그러자 전의 특이한 남색 머리와 갈색 눈동자가 확실하게 보였다. 카한 대륙엔 남색 머리는 많아도 갈색 눈동자는 없다. 남자는 턱 밑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 정도면 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전쟁에 자원하다니. 부모님 걱정이 말이 아니겠군.”
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조용히 사는 것도 낫지만 아버지께서 한 번쯤은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다고 해서 말이죠. 그리고 저 외에도 누나, 형, 동생이 하나씩 있으니까 별 걱정도 없고, 전 상업엔 관심도 없어요. 그리고.......”
전은 다시 창 밖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한 나라의 패망이 걸린 시점에서 편하게 누워 지낼 수만은 없는 일이죠.”
콰광!
“와아!”
사람들의 우렁찬 환호성에 화답하듯 묘익수들이 이러 저리 펼쳐진 화려한 불꽃 사이를 제비처럼 우아하게 비행했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그 날쌘 움직임에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전은 자신의 검의 손잡이를 더욱 세게 쥐었다. 5년 전쟁에서 본 묘익수들의 무서움은 바로 저 빠른 움직임이었다. 물론 휠씬 더 강한 소환수나 적군들이 많았지만 공중에서만큼은 가장 강한 존재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전 자신은 그것들과 싸움을 하려고 한다. 아니,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소환수를 뒤에 뒤고 싸운 다는 것은 너무나 부담되는 일이다. 전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오는 황제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환호하는 군중들을 조심스럽게 밀치고 피하며 걸어나가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단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
카한의 황제 이 리안은 나라의 건국기간만큼이나 오래되고 거대한 성의 망루에 서서 그의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오만하다고도 생각될 수 있는 날렵한 콧대와 눈빛, 그리고 몸에 베어있는 위엄은 한 나라의 왕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큰 회랑에 가까운 크기와 길이를 가진 망루 끝에 다다랐다. 붉은 색과 황금 색으로 치장한 기사들과 장군들이 그를 에워싸며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했으나 이리 안은 손으로 그들을 물리치며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가 손을 들어 백성들을 침묵시켰다. 좌중을 한 번 돌아본 뒤, 그의 입이 열렸다.
“카한의 백성들이여.”
쏴아아아.......
묘익수가 싸늘한 바람소리를 내며 그 위를 지나갔다. 무섭도록 차가운 움직임이었다. 바람보다 시리고 물보다 유동적인 움직임.
“그 동안 전쟁에서 쏟은 피와 눈물, 그리고 아픔은 건국 이래 우리가 쏟은 피눈물보다 많고 진할 것이요.”
순간 좌중을 휘감고 있던 흥분과 기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숙연함과 슬픔이 채워 나갔다. 그 분위기를 더욱 가중시키듯 왕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삶을 영유할 수 있었소! 카한 만세!”
-와아아아!
“카한 만세! 카한 만세!”
백성들은 거의 광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만세”를 외쳤다. 그때 왕이 손을 들어 그들을 침묵시켰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은 종전을 기념하여 성대한 잔치를 허락할 것이요. 부디 그 동안의 시름을 잊고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라오.”
-와아아아!
“만세!”
관중의 환호를 뒤로하고 이 리안은 천천히 내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좌우를 호위하던 기사들과 문무백관들도 그 뒤를 따르며 천천히 퇴장했다.
백성들의 환호성은 이 황제가 망루에서 물러나며, 또 수문장이 거대한 철문을 닫으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대전은 거대한 동궁이었다. 수 백의 사람이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넓이와 벽에 새겨진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양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할 정도였다. 그는 청동과 상아로 만들어진 용상에 앉았다. 그리고 피곤한 표정으로 잠깐의 연설을 위해 모인 문무백관들을 손을 저어 물러나게 했다. 그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하나 둘 대전을 떠났다.
“수고하셨습니다, 폐하.
푸른 색 비단으로 만든 문복을 입은 노(老)신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의 거동하심으로 오늘의 축제가 더욱 빛을 발한 듯 하여, 이 늙은이의 마음은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시모 대신. 그리고 어차피 뒷수습을 위한 축제 아니오? 짐은 오히려 너무 무거운 장례식을 끝낸 것 같이 마음이 무겁소.”
“폐하.......”
문관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시모 대신은 지난 60년 동안 문관생활을 하며 산전 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피해는 그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어쩌면 몇 십 년이 걸릴 지도 모르는 피해는 그를 비롯한 수많은 관인(官人)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시모 대신이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황제가 말했다.
“대신도 이만 물러나서 축제를 즐기시오. 짐은 혼자 있고 싶소.”
“알겠사옵니다. 편히 쉬시옵소서, 폐하.”
늙은 대신은 주군을 위로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대전을 조용히 나갔다.
“후우.”
텅빈 대전은 정말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곳곳에 밝혀진 횃불의 울렁거림 속, 불이 기름을 빨아들이는 소리, 그리고 굳게 닫힌 철창과 철문의 미세한 틈새로 들려오는 축제의 소근거림만이 간혹 들릴 뿐이었다. 그는 무심결에 대전의 오른 벽을 보게 되었다. 그곳엔 머리가 세 개나 달린 범과 자신의 선조가 대결하는 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모습은 그가 어릴 때부터 봐오던 것이었다. 범의 왼쪽 머리는 창에 맞아 절명했고 오른 쪽 머리의 오른 눈엔 화살이 박혀 있으며, 가운데 머리는 칼같이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 그러나 인간 역시 오른 손엔 거대한 대도를 들고 있었으나 왼팔이 있어야 할 곳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대신 왼팔은 범의 갈고리 같은 발톱 아래 깔려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횃불이 잠겨있는 기름이 바닥을 드러내며 기름이 빨려 올라가는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에 따라, 조각이 조금 움직인 것 같다고 그는 느꼈다. 아니,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실제로는 횃불의 장난이다. 그는 차가운 조각의 무표정한 시선을 응시하며 잠시나마 움찔했던 자신을 비웃었다.
“한 줄기 바람에도 길이 있다더니, 날 놀리기 위한 길이었군.”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몽상에 잠겼다. 어린 시절로의 여행.
그는 여유롭고 편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황제는 딱딱한 용상에 몸을 기대다가,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벌떡 일어나 용상 옆에 풀어놓은 검을 쥐었다. 바람? 바람이라고?
그는 굳게 닫힌 대전의 철문과 창문들을 재빨리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횃불이 그렇게 움직일 정도의 바람은 들어오지 못한다. 그는 검을 거세게 뽑으며 호령했다.
“누구냐!”
“......생각보다 감이 좋으시군요, 폐하.”
“넌......?”
황제는 목소리가 들려온 대전의 왼쪽 벽을 바라봤다.
“네 이름이 전...이라고 했던가? 아마 맞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 눈동자는 우리 나라 사람의 것은 아니니까. 자주 보기 힘든 눈동자라 기억하고 있지. 오랜만이군.”
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자 속을 빠져 나왔다. 그의 손엔 묵직한 도검이 들려 있었다. 전은 위치 상 위에 있는 황제를 올려보며 말했다.
“소인의 이름을 기억하시다니, 영광입니다. 폐하.”
황제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그의 한 쪽 눈꼬리가 불쑥 올라갔다.
“’그것’ 때문에 온 건가?”
전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니, 없지. 없어.”
전은 칼 끝을 황제에게로 향하며 물었다.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황제는 입에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며 반문했다.
“’그걸’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가 있던가?”
전은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칼이 아주 미약한 떨림을 보이다가, 다시 예기를 발하며 황제의 가슴을 겨누었다.
“절 용서하옵소서.”
“그 말은 날 벤 다음에나 듣도록 하세.”
전은 달려나갈 자세를 취했고, 황제 역시 공격 자세를 잡았다. 그때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전쟁이 끝난 직후,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전은 눈을 감았다. 전쟁이 끝나고 남은 폐허, 오직 허무뿐인 그 순간에 서있던 두 남자의 대화. 눈을 뜨면서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듯이, 책임이 무거워지면 무거워질수록 그 책임을 지게 하는 지게 역시 커진다.”
황제는 눈을 감고 그 말을 음미하듯 짧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외쳤다.
“오라.”
축제가 한창인 자정 경, 궁성을 재빨리 빠져나가는 검은 옷의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피살이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반 시간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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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후 상의후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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