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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년, 3월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왔다. 대륙의 남쪽, 노스구티의 바다는 이미 따듯한 바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바람을 맞이한 갈매기 하나가 수면을 차오르며, 수면 아래서 노닐던 물고기를 낚아올린다.
잔잔한 수면을 가르는 소리가 갈매기가 떠난 바다를 채웠다. 그 소리의 주인인 붉은 슬루프와 갈색 카락(carrack)은, 수평선 너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대륙을 향해 다가가는 카락의 갑판 위에 서 있는 딘은, 두 함선을 연결한 굵은 쇠사슬을 보며 일상이 되어버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나.”
“뭐야, 움직여도 돼?”
“죽을 정도는 아니다.”
부목을 댄 채 동여맨 다리를 끌며 다가온 티모시는, 딘의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 있나?”
“나야 모르지.”
“선장 겸 수석항해사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거야 옛날 일이지. 지금은 해적한테 잡힌 포로 신세라구.”
“으음.”
미세하게 인상을 쓰며, 티모시는 부러진 다리를 바라보았다.
“강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었지만,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 느낌이 남아있었다.
“위대한 영웅의 힘을 빌리고서도 질 거라고는…….”
“그놈이 괴물인 거야.”
납득하기 힘든 존재는 괴물이라고 정의해 버리는 것이 편하다. 단순히 그런 생각으로 꺼낸 말이지만, 티모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확실히 인간은 아니었다.”
“뭐?”
“아니,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조금 걸리는군.”
“에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명확한 답을 요구한다 해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답을 얻기를 포기한 딘은 고개를 돌렸다. 붉게 칠해진 함선. 그 위에 서 있는 은발의 청년이 보인다.
가만히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위압을 느끼게 하던 그 날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그 때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데에 전 재산을 걸어도 좋을 만큼, 그 날의 모습은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하긴, 저 정도니 7만 마르크나 되는 현상금이 걸린 거겠지.”
알스터 정부에서 걸린 3만 마르크의 현상금 외에도 무려 4만 마르크나 되는 금액이 걸린 목의 주인. 그 겉모습은 그 정도의 현상금이 걸릴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린 딘은 그것으로도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십만 단위는 걸어야 잡을 수 있을텐데.’
아니, 어쩌면 그것으로도 부족할지도 모른다.
단신으로 함대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은 지나치게 부풀려진 이야기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20년 전의 대 해적 유슈프 레이스(Yusuf Reis) 역시 그런 말을 들었던 사람이지만, 바다의 왕이라 불렸던 그도 겨우 여섯 척으로 이루어진 교회 소속의 함대에 붙잡혀 교수대로 끌려갔다.
그 유슈프에게 걸렸던 현상금은 약 7천 달란트. 마르크로 환산하면 20만 마르크에 달했다.
“유슈프 레이스와 엘베 반 에델슈타인. 그 둘 중에 누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
“레이스는 이미 죽었잖나.”
“살아있다면 말야.”
“그야 레이스지.”
“에?”
예상했던 것과 다른 대답에, 딘은 놀란 눈으로 티모시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함대의 규모가 다르지. 유슈프 레이스는 무려 여든 척에 달하는 함선을 거느리고 있었다. 겨우 슬루프 한 척으로 해양을 떠도는 해적이 그에게 비할 수 있겠나.”
“으음…….”
예상과는 다르지만 딱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딘은 질문을 바꿔보았다.
“그럼, 엘베 반 에델슈타인이 여든 척의 함선을 거느린다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유슈프를 처형한 이후 교회는 사설함대의 숫자를 제한하고 있으니까. 스무 척만 넘겨도 교회 소속의 전함대가 바다 끝까지라도 추격해서 침몰시키려 할 거다.”
“그러니까, 가능하다는 가정 하에서 말야.”
“뻔하지 않나. 당연히 저 녀석이겠지.”
“쓸데 없는 이야기는 그쯤 해 뒀으면 하는데.”
막 말을 꺼내려던 딘의 입을, 붉은 슬루프에서 들려온 청년의 목소리가 막았다.
“…….”
듣고 있었던 걸까.
거의 100피트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다 듣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단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듣고 있었던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딘은 비틀린 웃음을 물었다.
“듣고 있었던 건가.”
“그런 것 같네.”
살짝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엘베를 본 딘은 몸을 일으켰다.
멀게만 보였던 해안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항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한 듯이 움직이는 붉은 슬루프를 본 딘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은 채 티모시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본 티모시는, 잠시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선장 맞나?”
“전직이잖아, 전직.”
“…아마 적당한 어촌을 찾아낸 모양이다.”
“에, 어촌?”
“그럼 해적이 당당하게 항구로 들어갈 줄 알았나. 국가 공인의 사설함대가 아니라면 항구로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다고 부서진 배를 수리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뻔하지 않은가. 적당한 어촌을 하나 점령해서 물자를 보충하고 배를 수리하는 수 밖에.”
“아, 그런가.”
배는 항구로 들어가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던 일이다. 그러나 해적이라면 그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것도 현상금이 걸려 있는 입장이라면, 커다란 항구로 들어가는 것은 미치지 않고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저렇게 눈에 잘 띄는 함선을 가진 해적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살짝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돛의 방향을 바꾸는 해적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잔잔하게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다. 미처 돛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 카락이 흔들렸지만, 그다지 강한 바람이 아니기 때문인지 그 진동은 아주 짧았다.
자신이 탄 카락과 달리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는 슬루프를 보며, 딘은 감탄을 내뱉었다.
“해적질도 아무나 해 먹는 게 아니구나.”
“정규군 출신이라고 하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알스터 출신이라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래?”
“보통 해적이라면 저런 건 꿈도 못 꾼다. 아니, 해적이 아니라 정규 해군이라 해도 저렇게 할 수 있는 함대는 드물다.”
“교회 소속의 함대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알스터에 배치 된 함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함선은 어느새 해안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작은 바위섬에 가려진 어촌의 모습이 들어왔다. 대규모의 함대가 머물기엔 적합하지 않지만, 두 척 정도의 거함(巨艦)이 머물기엔 충분할 정도의 접안시설을 갖추고 있는 곳. 이런 곳을 용케도 찾아냈다는 생각을 하던 딘은, 조업을 하는 어선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곤 당황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익숙한 일이겠지.”
“뭐?”
“이 대륙에 해적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아…….”
그러고 보면, 현상금이 걸린 해적만 백 단위다.
그런 해적들은 항구보다는 이런 어촌을 이용할 것이 너무도 뻔한 일. 그렇다면, 저들이 도망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도망쳤다간 거슬린다면서 죽여버리겠지?”
“그런 건 군인 출신 귀족들이 끄는 사설함대가 더하다. 해적들은 그런 짓 잘 안해.”
“그래?”
“어촌 사람들한테 밉보이면 기항지가 줄어드니까.”
“아아, 그런 건가.”
대충 상황을 납득한 딘이 고개를 돌린 것과, 두 함선이 닻을 내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갑판 위로 튀어오른 물방울의 냉기를 느낀 딘은 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털었다. 가볍게 물기를 털어 낸 딘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핫스퍼에서 이십여 명의 해적이 딘이 서 있는 갑판으로 뛰어들었다.
“…….”
너무도 어이없이 나포당해서인지 존재하지 않던 공포가 밀려들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죽일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게 안심하기엔 해적들의 표정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설마, 다시 전투를 벌이자는 건 아닐텐데.”
“무, 무기를 버려라.”
“우린 이미 무장 해제당한 상탠데? 그것도 잘난 너희 선장한테.”
“으윽.”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해적을 향해 당황이 서린 눈길을 보내던 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비꼬는 것으로 받아들인 건지, 뒤를 돌아본 해적은 그것을 보며 잔뜩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딘의 옆에 선 티모시를 보곤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군.”
‘그렇겠지.’
잠깐이라고는 하지만, 티모시는 저 해적들의 선장인 엘베와 거의 대등하게 싸웠다. 물론 그건 엘베가 적당히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티모시의 도끼가 엘베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끊자마자 그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고, 그 때부터 티모시는 공격은 전혀 하지 못한 채 버티기만 하다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럼에도 엘베의 호흡은 아주 고른 상태였다. 격렬하게 움직인 사람이라기엔 너무도 편안해 보이는 모습. 그와 동시에, 딘을 포함한 선원들은 저항을 포기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해적들에게 있어 그 장면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자기들 선장인 만큼 어느 정도의 괴물인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딘은 두 손을 들어올렸다.
“어차피 우린 너희 선장 하나도 못 당해. 그러니까 용건만 빨리 말하라구.”
“으…….”
너무 당당하게 나와서일까. 오히려 완전히 당황해 버린 해적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티모시를 힐끗 쳐다보고는 애써 입을 열었다.
“배 수리를 도와야겠다.”
“하아, 벌써부터 강제 동원인가.”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 뭐, 그것도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죽일 생각은 없다.”
“에?”
어느새 다가온 걸까. 두 함선을 잇는 쇠사슬 위에 걸터앉은 엘베의 모습이 그의 눈을 채웠다.
“함선도 돌려주지. 아, 물론 화물은 포기해.”
“…의외로 양심적인 해적이군.”
“뭐, 이 배는 교회 소속도 아니니까. 그렇지, 셰어도어?”
“물론.”
쇠사슬에 걸터앉은 엘베와는 달리, 정상적인 방법으로 넘어 온 공무원 풍의 사내는 잠시 옮겨 탄 함선을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항해에 적합하긴 하지만 전함으로 쓰기엔 너무 느리고, 그렇다고 마땅히 팔아 치울 곳도 없지. 침몰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우리도 뱃사람인지라 그건 별로 탐탁치 않아서 말야.”
“그런데, 우릴 살려주면 추격대가 따라 붙을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이, 이봐.”
갑작스레 들려 온 티모시의 발언을 들은 딘은 잔뜩 굳은 얼굴로 그와 엘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꽤나 길게 느껴진 시간이 흘렀다.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엘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긴장하고 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짧은 대답이다.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본 딘은 비웃음을 입에 문 해적들을 보며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밀려드는 안도감보다 이유 모를 패배감이 더 짙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다시 엘베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날 쓰러뜨릴 수 있는 인간은 없을테니까.”
“…….”
오만하다고 느껴질 내용의 발언이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은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아니, 있다.”
“응?”
“와칸의 영혼은 패배를 모른다. 비록, 그 상대가 대륙 전체라 할 지라도.”
“그렇다면, 패배를 느끼기 전에 쓰러뜨리면 되겠군.”
“……!”
화가 난 걸까.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티모시를 본 딘은, 금방이라도 그가 엘베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베의 말을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참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딘은 티모시를 대신해 말을 이었다.
“교회에서 나선다면 어쩔 거지?”
“그건 너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교회가 나선다 해도 물러날 뜻은 없어 보였다.
근거 없는 오만인 걸까, 아니면 근거 있는 자신감일까.
“쓸데 없는 잡담은 그만했으면 좋겠군.”
엘베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커틀라스가 그들을 향했다.
“윽.”
“자, 그럼 부탁하지.”
살짝 웃음을 문 공무원 풍의 사내를 보며, 딘은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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