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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른헴.


"건방진 자식."
반쯤 깨져나간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아론은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엘베는 오히려 그 계획을 망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딱히 흠을 잡을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최상의 활동을 펼치고 있기에 어떤 제재를 가할 명분도 없다. 정말 기분 나쁜 일이지만, 아론은 엘베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불쌍히 여겨서 거둬줬더니만……."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끈 아론은 눈을 감았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집을 나간 막내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화를 참을 수 없던 그는 아들을 꾀어낸 요녀를 죽이기 위해 당장 에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아들과 꼭 닮은 다섯 살의 꼬마 뿐이었다.
은발이 아닌 금발이었다면 자신의 아들이 어려졌다고 생각했을 만큼, 그를 닮은 아이를 본 아론은 잔뜩 치밀어 오른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왔지만, 그는 곧 그 결정에 회의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이와 자신의 아들은, 외모 외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항상 따듯하고 밝았던 아들과 달리, 아이는 차갑고 냉정했다. 그리고, 모략이라면 이미 겪을 만큼 겪어왔던 자신마저도 경악할 정도로 교활했다. 정치판에서 꽤나 굴러먹었던 자신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지내왔지만, 아이는 자신을 향한 적의엔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정확히 10년 전, 밤을 틈타 저택을 침입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이의 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온 몸이 갈기 갈기 찢어져 있던 침입자는 집사에 의해 발견될 때 까지 살아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피묻은 손을 숨기지도 않은 채 집사를 맞이했다. 그것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날, 에델슈타인 가의 집사는 공포에 질린 채 20년간 일했던 곳을 떠났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알 수 없었던 아론은 그날부터 유심히 아이를 관찰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 후 몇 번의 침입이 더 있고 나서야, 아론은 아이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후우."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그는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이마를 두드렸다.
"확실히, 성과는 뛰어나."
그래서 더 골치가 아프다.
1함대나 2함대와는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로 초라한 함대를 이끄는 주제에, 엘베는 그 두 함대가 거둔 성과를 합한 것만큼의 성과를 거뒀다. 심지어, 엘베는 에더 근방에서 강한 세력을 일궈놓았던 해적 중 하나인 베니토 데 솔토의 함대마저도 궤멸시켜 버렸다. 바로 한 달 전에 2함대가 그들을 피해 달아났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기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일을 해 낸 것이다.
"하지만, 슬슬 재계에서도 눈치를 챈 것 같으니 이쯤에서 시작해야겠군."
사석(捨石).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버리는 패(牌)로 쓰긴 아깝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어쩌면 엘베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모를 리가 없다. 그 정도로 멍청했다면 자신의 손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함대의 규모를 키우지 않는 것 역시 그래서일 것이다. 이미 손가락만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함대를 격파했음에도 함대의 규모가 처음과 같다는 것. 그것은 도주의 용이성을 위한 것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하긴, 상관 없나."
어찌 되었건 결론은 같았을 것이다.
품속에서 꺼내든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는 창밖의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마찬가지니까 말야."



"……."
비가 내린다.
와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물론 숲이 우거진 곳에서는 비가 내리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곳, 드넓은 황야가 펼쳐진 곳에선 이 정도의 비를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래서인지, 그로서는 드물게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곧 찌푸려졌다.
옅어진 구름의 장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빛. 그것을 본 그가 입술을 깨물었을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티모시?"
익숙한 목소리. 그 주인을 확인한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조심해라, 딘."
"응?"
의아함을 담은 눈길이 닿는다.
"무슨 소리야?"
"비가 오는데도, 붉게 빛나는 별이 있다."
동문서답이다. 그러나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하늘엔 구름이 껴 있어 별은 보이지 않았다.
"별이 어디 있는데?"
"보이지 않는 건가."
가끔… 아니, 자주 생각하는 거지만, 와칸인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하얀 호랑이가 피를 탐하니……."
"뭐?"
"아니, 너희들이 이해할 수는 없을 거다."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웬지 모를 한기가 감돈다.
'비가 와서 그런가.'
찾아든 한기를 애써 떨쳐내려 노력하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뒤를 이어 들려온 발소리가 무겁게 느껴져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맨 티모시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전투를 앞에 두고 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뭐, 뭐야?"
"준비해라."
"갑자기 무슨 소린지는 얘기해 줘야 할 거 아냐."
"피를 부르는 영혼이 가까이 왔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역시나 와칸인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딘은 돛대에 매달린 종을 가볍게 흔들었다.
밤이기 때문인지, 비가 오는데도 소리는 크게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하나 둘씩 켜졌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잔뜩 긴장한 눈으로 갑판으로 뛰어든 선원들을 본 딘은 그들의 험악한 눈초리에 움찔했지만, 굳이 그들에게 종을 울린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배다."
낮게 울린 티모시의 목소리가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점점 옅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흐릿한 실루엣이 스쳤다.
"뭐, 뭐야 저건."
곳곳이 찢어진 돛이 바람에 나부낀다. 부서진 갑판이 삐걱거리는 소리, 찢어진 돛에 부딪친 바람이 울어대는 소리가 고요를 파고든다.
트로이메라이 서쪽에서 나타난다는 유령선이 떠오른 것은, 비단 딘 뿐은 아닐 것이다.
"핫스퍼라고 적혀있군."
"뭐?!"
들은 적이 있다.
알스터의 정규 함대 출신. 함선을 얻자마자 반란을 일으켰고, 불과 3개월 만에 대륙 최고의 악몽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내의 함선이다.
그런 그것이, 저렇게 변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그럼 저건 난파선인 거야?"
"아니, 폭풍을 만난 것 같군."
"그럼!"
"적이다."
막 대답을 하려 입을 연 순간, 붉은 화염이 그들을 덮쳤다.
"제기랄, 저 모양이 돼서도 화약이 멀쩡할 수 있어?!"
"그런 것 같군."
도끼를 고쳐 쥔 티모시는 선수를 향해 발을 떼었다.
그 순간, 핫스퍼는 그들이 탄 함선의 머리를 받았다.
"큭"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충격이 찾아들었다. 200파운드가 훨씬 넘는 거구인 티모시마저 도끼에 의지해 간신히 몸을 가눴다.
다른 선원들은 기둥을 붙잡거나, 난간에 몸을 기대 충격을 견뎠다. 간혹 바다에 빠진 선원도 있었지만, 그들을 건져 줄 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선원들은 그들을 향한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빗물에 젖어 회색 빛이 드러난 은발에 싸인 얼굴은 차갑게 느껴졌다. 날카롭게 치켜뜨지도 않은 두 눈. 그것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몸을 억눌렀다. 발을 떼는 것도, 심지어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다.
어느새 갑판 위에 서 있는 그의, 굳게 닫힌 입술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럭 저럭, 쓸만 하군."
거센 바람이 불어, 검은 곤룡포(袞龍袍)가 나부낀다.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두려웠다.
"붉은 별."
"티, 티모시?"
거대한 도끼를 들어올린 채 가뿐 숨을 내쉬는 거인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걸까.
"와칸인인가."
"그렇다."
그저 길가에 널린 돌멩이를 보듯이 함선을 바라보던 청년의 눈이 자신을 노려보는 티모시를 향했다.
결코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다. 그러나 적의도 아니다. 그저 흥미가 느껴진다는 듯한, 그런 눈.
다른 사람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될 법한 티모시마저, 그에겐 흥미를 끌 만한 상대로만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할 말은?"
"네놈……."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쉽게 뛰어들진 않는다.
"요, 용건이 뭐냐!"
"뻔하지 않나. 배를 빌려달라는 거다."
"으윽."
"보다시피, 폭풍을 만나서 말이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 청년의 말에, 딘은 왠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수리할 만한 자재가 있다면 넘겨줬으면 좋겠군. 그럼 배를 빌릴 필요는 없을테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당연하지. 그럼 여기까지 와서 농담을 할 것 같나?"
간단히 받아친 그는 다시 한번 배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이 발을 붙잡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만 같아,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거절한다."
"응?"
"티, 티모시?"
"흐음."
평소보다 낮은 음색.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딘은 그런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강령술이라니, 말도 안 돼.'
몸을 조금 움츠리고 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떨리던 그의 몸은 완전히 긴장이 풀려있었다.
이상한 기색을 느낀 걸까, 갑판에 몰려있던 선원들도 조금씩 발을 떼어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해적 따위에게 배를 넘겨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와칸인이 선장일 리는 없을텐데."
"네놈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은가."
티모시의 검은 눈이 하얗게 변했다는 것을 확인한 딘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청년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건방지군."
아니, 다르다.
눈썹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러나 공포는 아니다. 그저, 귀찮은 것을 볼 때의 표정에 지나지 않는다.
"……."
그 표정에 화가 난 건지, 티모시는 도끼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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