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식은 예상과는 달리 꽤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그럴수록 선전 효과가 좋아지니까.’ 라는 말로 애써 폄하했지만, 그런 엘베도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없다. 그러나 왠지 기분이 나빠져, 엘베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려 모여든 군중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쳇.”
은빛 돛을 단 프리깃의 모습이 보였다.
에스메랄다(Esmeralda). 그게 저 프리깃의 이름이다.
“돈으로 발랐군.”
“기본 건조비만 6만 7천 마르크나 들었으니까.”
“하여간, 맘에 안 들어.”
여전히 퉁명스러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본 엘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결국 탔네?”
“앞길 창창한 나이에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해적이 되겠다는 거냐.”
“80 마르크로 일년을 버티느니, 차라리 해적이 돼서 담배나 원없이 피워보고 죽으련다.”
“…멍청한 놈.”
“뭐?”
“아니, 별 거 아니야.”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에스메랄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그는 시선을 조금 앞으로 돌려 에스메랄다를 다시 눈에 담았다.
마치 자신이 탄 핫스퍼가 에스메랄다를 따르는 듯한 형상이다. 물론 에스메랄다는 2함대의 기함이기에 3함대인 핫스퍼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당연함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셰어도어.”
“응? 왜?”
“…넌 함장에 대한 기본적인 존경심도 없는 거냐.”
“어쩌라고.”
“…….”
졌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은 엘베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돛을 모두 펴.”
“그런 건 좀 직접 명령해라.”
투덜거리면서도, 셰어도어는 선원들을 향해 명령을 전달했다. 곧 모든 마스트에 매달린 돛이 활짝 펴졌고, 순풍을 한껏 머금은 핫스퍼는 에스메랄다를 추월해 제 1함대의 기함인 하프문에 바짝 다가갔다.
“이봐, 함장.”
“응?”
“2함대에서 항의가 들어왔다는데.”
“무시해.”
짧은 말을 내뱉은 엘베는 다시 선수 쪽으로 눈을 돌렸다.
따라잡을 듯 가까이 갔지만, 하프문은 다시 핫스퍼에게서 멀어졌다. 추월했던 에스메랄다 역시 핫스퍼와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추월당했던 것이 기분나빴는지 돛을 모두 편 에스메랄다는 곧 핫스퍼를 제쳐 하프문을 향해 다가갔다.
돛의 숫자가 부족한 핫스퍼는 하프문과 에스메랄다가 멀어지는 것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느낀 엘베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뒤를 돌아보았고, 핫스퍼의 뒤를 따르는 몇 척의 슬루프를 보곤 선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진로 변경. 선수를 풍하로.”
“아직 예상 지점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함장님.”
“말 한번 잘했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함장은 나다.”
비스듬하게 쓴 모자를 약간 들어올리며, 엘베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선수를 풍하로.”
“…아이, 아이, 써(sir).”
푸른 눈에 담긴 살기를 읽었던 걸까.
뭔가 말을 하려던 항해사는 목에 고인 침을 삼키며 몸을 돌려 신호를 보냈다.
순풍에서 역풍으로 바뀐 바람이 돛에 닿았다. 바뀐 바람에 적응하지 못한 함선이 약간 흔들렸지만, 능숙한 선원들은 그 흔들림을 안정으로 바꿔놓았다.
핫스퍼의 뒤를 따르던 함선들에서 항의를 담은 신호가 들어왔다. 그러나 엘베는 답신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이어지던 항의가 멎을 무렵, 핫스퍼에서 한 발의 포성이 울렸다.
“…….”
“하, 함장!”
“무슨 짓이야!”
“메인 마스트의 돛을 모두 내린다.”
“이게 무슨 짓이냐구!”
갑판에 있는 포를 발사한 엘베를 향해 경악이 가득 실린 고함이 들려왔다. 그러나 엘베는 그들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옆에 놓인 포환을 하나 집어들었다.
뼈와 살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한 사람의 손이, 철로 만들어진 포환을 마구 구기고 있었다.
갑판에 선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그들의 입에서 터지던 고함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여전히 크게 벌어져 있지만, 그들의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듣지 못했나?”
비웃는 듯한 음색이 실린 소리를 내뱉으며, 엘베는 구겨진 포환을 집어던졌다.
1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에스메랄다의 지가마스트가 엘베가 던진 포환과 충돌했다. 그리고, 포환은 그것을 뚫고 바다로 향했다.
포환이 바다로 떨어지는 소리는, 핫스퍼에 승선한 사람들의 정신을 깨웠다.
“이, 이게 도대체…….”
“다시 말한다.”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며, 엘베는 입을 열었다.
“메인 마스트의 돛을 모두 내린다.”
“미, 미쳤어!”
“죽고 싶지 않다면, 명령을 듣는 게 좋을텐데.”
“웃기지마!”
엘베의 입이 비틀렸다. 그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옆에 서 있던 셰어도어 뿐이었지만, 그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멍청하긴.”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움직임을 놓쳤다.
셰어도어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고함을 지른 항해사를 바다로 집어던지는 엘베의 모습과, 그것을 보며 눈을 부릅뜬 다른 선원들의 모습이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다음, 있나?”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입을 여는 사람도 없다. 그저 경악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엘베를 바라볼 뿐, 다른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치 챘군.”
그런 적막을 깬 것은 엘베 본인이었다.
“전투 준비.”
“이, 이 미친 놈아!”
“셰어도어.”
“완전히 미친 거냐!”
“어차피, 우린 버리는 패야.”
선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러나 엘베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팔을 들어올리며 그들을 향해 명령을 전달했다.
“전투 준비. 포문을 열어라.”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선원들은 엘베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지만, 그런 마법이 없었다는 것은 그 모습을 보는 셰어도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발포.”
갑판 아래에서 연기가 일었다. 그에 맞춰 갑판 위에 놓인 작은 대포도 불을 뿜었다.
허공을 뛰어넘은 포환이 에스메랄다를 따르던 슬루프에 닿았다. 마스트가 부러지는 모습과, 갑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핫스퍼에 승선한 선원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엘베를 바라보며 고함을 지르는 선원들이 하나씩 나타났지만, 엘베는 그런 그들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바다를 향해 던져버렸다.
“제기랄!”
어차피 선택권은 없다는 것을 느낀 선원들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승산이 없는 전투다. 그러나 바다를 향해 뛰어들수도 없다. 아직 빙하가 내려올 시기는 아니지만, 이 시기의 바닷물은 사람이 들어가기엔 너무도 차갑다. 아마도, 바다로 내던져진 선원들은 심장이 멎어버렸을 것이다.
“포격에 대비하라.”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선원들의 눈에 보인 것은, 바다를 항해 시선을 고정시킨 엘베의 모습이었다. 마치 뒤에서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에, 핫스퍼의 선원 일부가 검을 빼들곤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커, 컥!”
“혹시, 더 있나?”
강철로 만들어졌을 커틀라스가 기괴한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리고, 삼백 파운드는 넘어 보이는 선원 하나가 엘베의 왼손에 붙들려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이 경악한 선원들의 눈에 새겨지고 있었다.
“쳇.”
무슨 소리라도 들었는지, 눈을 찡그린 엘베는 자신의 왼손에 붙들려있던 선원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날아든 포환이 그 선원의 배에 꽂혔고, 그것은 던져진 선원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
“이, 이게…….”
다시 한번, 커다란 포성이 그들의 귀를 울렸다.
어느새 핫스퍼에 가까이 다가선 하프문의 포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사된 포환은 핫스퍼를 지나 에스메랄다를 향했다. 잔뜩 긴장한 채 주저앉아있던 핫스퍼의 선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에 멍한 눈으로 엘베를 쳐다보았지만, 엘베는 그런 선원들에게 대답 대신 싸늘함을 잔뜩 담은 명령만을 내렸다.
“선수를 북동으로.”
“엘베?”
“항구에 정박된 함선을 공격한다.”
“이, 이게 도대체…….”
“명령이다.”
조금 흘러내린 모자를 벗어제낀 엘베는 고개를 돌려 하프문과 에스메랄다를 바라보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선수를 이리저리 돌리며 잔뜩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였고, 하프문은 소속 함정들과 함께 에스메랄다를 포위했다.
에스메랄다를 따르던 2함대의 함선들은 이미 백기를 올리며 돛을 내렸다.
정상적인 전투였다면 이렇게 빨리 결론이 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말 전투였다면 하프문이나 에스메랄다 둘 중 하나는 이미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 짜여진 하나의 연출이었다.
“하, 함장.”
“포격 실시.”
어느새 항구가 손에 닿을 것처럼 보이는 지점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리자 출항을 준비하는 전함의 모습이 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당황해서인지 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함선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능숙한 움직임을 보이는 함선들도 당황한 함선들에 가로막혀 정상적인 운항을 할 수 없는 상황만이 나타나고 있었다.
“…포격 실시.”
재차 포격을 재촉하는 엘베의 눈에 서린 살기를 느낀 선원들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다. 평소라면 탄약을 장전하는 데만 20초는 걸렸을 선원들이 그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장전과 포격을 실시했다. 물론 그 정확도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저렇게 몰려있는 상대에겐 그것만으로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멍청하긴.”
간혹 두 세발의 포격이 날아왔지만, 핫스퍼를 향해 똑바로 날아온 포환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이 미친 자식아!”
“어차피, 이렇게 될거였어.”
“뭐?”
“넌, 실업수당이나 받으면서 지내는 게 더 나았을 거야.”
“도대체 무슨 짓이냐구!”
“나중에 말하자.”
갑자기 손을 들어올린 엘베를 향해 입을 열려던 셰어도어의 입이 닫혔다.
“따갑군.”
“그, 그게 끝이야?”
“그럼, 뭐가 더 필요하지?”
손에 잡힌, 연기가 피어오르는 포환을 떨쳐내면서, 엘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좌현 24도. 포격.”
핫스퍼에서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에스메랄다에서 백기가 올려졌다. 2함대를 제압한 1함대의 선수가 항구를 향했고, 그들은 핫스퍼와 같이 항구를 향해 무차별적인 포격을 감행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계획대로 된 거지. 순서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무슨 계획!”
“알스터 정부의 계획… 이라고 해야겠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셰어도어를 잠시 바라본 엘베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포격을 재촉했다. 곧 수십발의 포환이 핫스퍼를 벗어나 항구로 향했고, 제멋대로 얽혀 움직이지 못한 함선들이 포격을 받아 침몰되는 모습이 엘베의 눈을 파고들었다.
그런 모습은 약 십분 간 계속되었다.
“선수를 남으로.”
“엘베?”
“빠져나간다.”
조금씩 배를 물리는 하프문을 본 엘베의 입이 열렸다.
하프문, 에스메랄다. 그리고 핫스퍼 모두 항구에서 멀어져갔다. 그것을 본 전함 몇 척이 부유물이 떠다니는 항구를 벗어나 그들을 추격하려 했지만, 항구를 벗어난 전함은 재차 이루어진 포격에 바다로 가라앉았다.
“…이봐. 엘베.”
“뭐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지금까지 본 대로.”
“이해가 안 되니까 묻고 있는 거잖아!”
“아까 말했을텐데.”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끼며, 엘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알스터 정부의 계획이야.”
“뭐?”
“물론, 그들도 당황했겠지만.”
고개를 돌려 항구를 바라본 그의 눈으로 수많은 부유물들에 가로막힌 부두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마도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없다. 진수식 도중에 벌어진 일이기에 더 충격적이겠지만, 그 충격이 가라앉는 것은 금방이다. 아직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정부는, 원하던 것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해군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 함장님.”
“뭐지?”
“하프문에서, 여, 연락이…….”
“이곳으로 오겠다는 거겠지. 허락해.”
“아, 알겠습니다.”
잔뜩 겁에 질린 선원이 물러간 것과 동시에 핫스퍼를 향해 바짝 다가오는 하프문의 모습을 보면서, 엘베는 느린 걸음으로 캣헤드(Cathead : 이물의 좌우에 튀어나온 굵고 짧은 각 재. 닻을 일시적으로 내려뜨리기 위한 것)를 향해 걸었다.
캣헤드에 손을 댈 무렵, 바짝 다가온 하프문에서 자신을 향한 소리가 들려온 것을 느낀 엘베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원래대로라면 에더 부근에서 실행해야 할 텐데.”
“그랬지.”
“그런데?”
“그냥. 한방 먹이고 싶어서.”
“미친놈.”
졌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 청년의 입이 다시 열렸다.
“친애하는 법무관께서 화가 많이 나셨겠는데.”
“친애 좋아하네.”
퉁명스럽게 말을 받아친 엘베를 보며, 청년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계획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잖아.”
“그래서?”
“…도대체 어쩌려는 거야?”
“정부 계획 따위. 알게 뭐야.”
“정말 미친 거냐.”
“그럴지도.”
확실히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짓이다. 그러나 이제와서 자신의 정신상태를 점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엘베는 손을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항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곳에 와 있었다. 잠시 고개를 아래로 향하자 여전히 불안에 가득 찬 선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딱히 불만을 토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한 그들의 얼굴을 본 엘베의 입엔 비웃음이 물렸다.
“궁금한가?”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구심이 가득 담긴 눈을 들어 엘베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대화를 들었을텐데도 납득하지 못하는 그들을 본 엘베의 입에 물린 비웃음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짙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외엔 고개를 돌려버리는 습성이 있다. 그것은 이 함선에 탄 선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생물이 가진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럼, 말해주지.”
저들은, 정황을 다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엘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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